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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시골 공동묘지엔 딱히 길이라고 내세울 만한 길이 없다.



고향 마을이 남해안의 어느 바닷가였다.

우리 마을은 워낙 외진 곳이라서 마을 앞 바닷가 신작로 중심에서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1킬로쯤은 나가봐야 다른 마을이 나오는 동네였었다.

지금은 그 바닷가 길이 매우 좋아졌지만, 70년대 초 그 길은 바닷가였지만, 산길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대낮에도 간간이 오갔지만, 밤중엔 그 통행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그 길모퉁이와 골짜기마다 과거 해방과 6.25를 전후해서 수많은 민중이 학살됐던 자리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 시신들 제대로 수습됐을지 아니면 대충 돌을 쌓아 묻었을지 그런 사실도 중구난방이다.

그랬든 저랬든 그래도 그곳 바닷가에선 마을끼리 아웅다웅하면서도 살아났었다.

살려고 살아내려고 모두가 걷어붙이고 달라붙어 애쓰던 그 시절 그러니까 70년대 중반의 일이다.

우리 마을과 행정구역을 달리하는 옆 마을 사이로 어느 날 거기 바닷가를 통해서 북으로부터 간첩이 들어왔었다.

그곳으로 간첩이 왔다는 정보를 어떻게 낚아챘던지 우리 마을에 헬기도 내리고 완전군장의 군인들이 들이닥치기도 했었다.

우리 마을 신작로 한편의 공터로는 예비군도 우르르 몰려들더라.

나 그때 처음으로 어느 예비군한테서 총을 달라고 해서 그 총을 만져봤었다.

탄창이 없는 'M1'이었다.

오늘날엔 그 'M1'을 만나기는 매우 어려울 터다.

80년대 중반에 나는 주로 'M16'을 갖고 놀았는데 훗날 예비군 훈련 갔을 때 '카빈총'이 아니고 바로 그것 'M1'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여기까지만 보면 내가 '워커에 물광 내며 군대 짬밥' 좀 먹었을 거로도 보이겠지만, 나는 그런 급엔 어림 반 푼어치도 없고 그냥 '방위병' 출신이다.

아까 우리 마을에 간첩이 내려왔다고 말했는데 그건 해방 전후의 대한민국 역사와 그 맥이 이어진다.

우리 마을은 아니고 우리 옆 마을에서 그 시기에 북으로 떠났던 누군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시절엔 죽음과도 같은 난리가 났었는데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뒤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그 인사와 또다시 연결됐던 모양이다.

그 탓에 우리 마을과 옆 마을 사이의 바닷가에 '국가 보안 시설' 느닷없이 생기게 됐다.

그것도 처음엔 '해경(해안경찰청 소속의 군사시설)' 초소 들어왔었는데 몇 년이 지나자, 그 자리 '군사시설' 초소로 변모해 버렸다.

우리 마을을 중심으로 좌우 마을을 거쳐 앞쪽의 섬 지역까지 아마도 반경 5~10제곱킬로미터쯤은 커버했으리라!

나를 비롯한 방위병 대다수는 낮 근무 때는 상황실에서 무전기 들고 예하 부대와 상부를 연결했었고 밤이 오면 현역한테 그 자리 넘겼으며, 밤 근무 때는 현역병과 조를 이루어 해안을 초소 단위로 밀면서 수색도 병행하는 근무에 투입했었다.

날마다 바다에 일 나가는 어선을 찾아 상부에 보고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밤 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이 있는 본대에 들어왔을 때 실탄 등에서 하나라도 빠뜨리거나 하지 않고 반납하는 것도 일은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무사하던 어느 날은 비가 심하게 내렸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때가 장마철이었나 보다.

매일 매복 근무하는 처지에서 가장 싫은 게 비 오는 거였다.

비가 안 올 땐 이따금 매복하는 초소에서 세상 편하게 뒤집어지기도 했었는데 비가 오면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날 밤은 그런데 그놈의 비가 문제가 아녔다.

'후 으응 - 후 으응 -' 어디선가 울부짖는 그것도 같고, 어찌 보면 그것도 아닌 동물의 울음소리도 같고….

그 시절 우리 마을 부녀회에서는 '쥐잡기'의 대 일환으로 고양이 몇 마리를 막걸리 판매를 돌려가면서 했듯이 고양이 키우는 그것도 집집이 돌아가면서 키웠었는데 그것 한두 해가 지나자 감당할 수 없는 선이 돼버렸다.

키우던 고양이가 집 나가서 저희끼리 붙어서 새끼까지 쳤는데 그 수가 얼마나 늘어났던지 알아낼 수도 없었고 이젠 완전히 들고양이가 되어 우리 마을 원수가 돼버렸었다.

그 고양이들이 울어대면, 또 그것만큼 듣기 싫은 소리도 없었다.

그랬기에 아까 들렸던 그 소리가 혹시라도 고양이 울음소릴지 가늠도 해봤었다.

그러나 소리가 나는 쪽 그 자리는 낮에도 잘 안 가지만, 밤으로면 그 누구도 갈 턱이 없는 '공동묘지'가 있는 자리였다.

우리처럼 집도 절도 없는 집안이나 그 부근 대략 십 리 안팎에서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집안에서 상이 나면 딱히 갈 곳도 없으니까 그 공동묘지에 묻힌다.

나의 선친께서도 그 당시엔 그곳에 계셨기에 그곳 공동묘지 지리에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었지만, 밤중엔 더군다나 억수로 비까지 내리는 날엔 그 지리를 어림한다는 건 말 그대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으리라!

그래도 나는 그 정체를 알아야 했다.

M16에 탄창 끼우고서 처음엔 슬금슬금 걷다가 어느 지점부터는 들키지 않으려고 포복 자세로 기어 올랐다.

공동묘지는 상당한 경사가 졌는데 그렇게 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얼마쯤 오른 뒤 고개 들고서 집중했더니 그건 짐승의 소리가 아니고 사람이었다.

그쯤에서 나는 그 신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함께 나온 내 여자 친구의 모친이시다.

내 친구는 형제가 열몇쯤이었는데 그중 가장 큰 맏이가 그 얼마 전에 '서글픈 사정'으로 운명하셨다.

나보다는 다섯에서 일곱쯤 더 잡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그분은 평생-정확히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으나 남의 집에 머슴으로 살다시피 했던 분이다.

'나이는 들어서 반려자도 만났으면 좋으련만, 혼례도 치르고 자식을 거뒀으면 좋으련만, 그 아내와 함께 부모도 모시고 알콩달콩 살아보고도 싶었으련만….'

그분은 주변에 그 어떤 말도 남긴 거 없이 홀연히 떠나셨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 그 비슷한 처지의 다른 형님도 객지에서 날품 팔다가 크게 다쳐서 몸이 부서진 뒤 이 형님처럼 살그머니 떠나셨단다.

그리고 / 그리고 그 비가 내리던 날 - 온종일 하염없이 뿌리던 날 어머니께서 형님의 산소에 오르셨다.

짐승이 울부짖는 거처럼, 가슴이 부서지고 심장이 녹는 거처럼, 평생을 울어도 모자라 다음 생에 울 그것까지 다 끌어다가 우는 거처럼 어머니는 그 밤을 우셨던 거다.

나는 망설였다.

- 이 자리 어떻게 피해서 가나? -

- 어머니한테 들키지 않고 나 어떻게 도망갈 거냐? -


나중에 나에겐 부대에서 다른 임무가 하달되어 집에서 겨우 5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는 초소-어선 통제소에 전담으로 근무하게 됐는데 틈날 때마다 그때의 그 어머니가 생각나더라!


2년 전이었던가, 3년 전이었던가?

이따금 그 시골에 내려가는데 그때도 내려갔다가 어떤 자리서 무심결에 그 어머니를 만났다.

나 혼자가 아니고 동생 차를 타고 가니까 당연히 동생도 그 자리 있었는데 어머니는 막무가내 우리 형제를 끌어당겼다.

- 야!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려고 하냐? 우리 집으로 가자! 밥 차려줄게!!! -

그날 나는 우리 어머님이 차려준 밥 - 진수성찬 시원하게 비우고 왔다!

그런데 그 어머니 아직 그 자리에 살아계실까?

아니면, 벌써 떠나고 안 계실까?

어머니! 우리 어머니!! 혹시라도 떠나셨다면 그 자리선 이승에서 보낸 세월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편하고 안락하게 지내시옵소서~!~

Posted by 중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