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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혁명가 _ 트로츠키, 혁명에 배반당하다

레온 트로츠키

Leon Trotskii, 1879.11.7~1940.8.20

 

 

"옛날 원시인들은 숲 속을 절뚝거리고 헤매 다녔습니다.

공포 때문에 미신에 사로잡혀, 작은 신들과 작은 차르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많은 작은 신들을 하나의 큰 신으로, 많은 작은 차르들을 하나의 큰 차르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차르도, 신도 내던져 버리고, 인류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려고 투쟁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 과업을 비로소 성취하려는 역사적인 투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툼보다는 협력을,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이제까지 인류 발전의 수십만 년의 역사는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레온 트로츠키, 1917년 반혁명군의 공세에 절망 상태에 있던 콤소몰에서의 연설.

 

"뛰어난 지성과 행정적 효율성으로는 트로츠키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적 능력보다는 회유와 공포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사람들은 트로츠키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콜린 에번스, [음모와 집착의 역사]

 

 

러시아, 혁명의 길로

한없이 넓고, 더없이 춥고, 아시아와 유럽에 널리 걸쳐 있는 나라, 러시아.

이 특별한 나라를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는 건국 때부터 계속 있었다.

16세기에는 이반 4세를 비롯한 루리크 왕조가 몽골, 투르크, 폴란드 등의 침략을 물리치고 차르 체제를 세워 전 러시아를 하나로 묶었으며, 18세기에는 표트르 1세나 예카테리나 2세 등의 로마노프 차르들이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서구 절대주의 체제를 모방하여 근대화를 꾀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 서유럽이 과학과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힘으로 세계를 지배해 갈 뿐 아니라 시민혁명으로 '국민국가'를 이룩했던 시기에, 러시아는 아직도 중세적, 러시아적인 모습을 많이 남긴 채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알렉산드르 1세가 타도 나폴레옹에 앞장서면서 위신을 세우기도 했으나, 이후의 크림 전쟁은 러시아의 국력이 서유럽 제국들보다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더구나 국민의 대다수가 농노로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착취당하고, 산업과 학술의 발달은 서구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이며,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사상은 러시아 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들에 의해 잔혹하게 탄압당했다.

이런 러시아의 후진성을 극복하려 개혁에 임했던 사람이 알렉산드르 2세였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허용하면서 민주주의는 허용하지 않고, 농노제는 폐지하면서 봉건적 농촌질서는 폐지하지 않는 모순에 찬 개혁 작업은 그나마 황제가 1881년에 암살되면서 끝이 났다.

그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3세는 그나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개혁의 싹을 구둣발로 짓뭉개며 철저한 전제적, 수구적 노선을 고집했다.

이제 차르에게 개혁의 희망은 품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이제야말로 위로부터의 개혁, 한 사람의 영웅적 지도자의 개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 인민에 의지와 투쟁에 의한 혁명의 길로 가야 한다는 인식이 고조되어갔다.

그것은 러시아에 일찍이 없던 길이었고, 따라서 희망과, 불안에 가득한 길이었다.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 태어나

러시아에서 소외되고 있던 집단 중에는 소수민족도 있었으며, 그 중에서 유대인들은 중세 때와 마찬가지로 특수 구역인 '게토'에서만 거주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우크라이나 지방을 개간할 필요성 때문에 이곳에 이주하고 개척하는 유대인에게는 여러 가지 제약을 면제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

많은 러시아 유대인들이 서부로 향하던 미국인들처럼 우크라이나로 갔으며, 그 중에는 다비드 브론슈타인, 즉 트로츠키의 아버지도 있었다.

그는 야노프카에 정착한 후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일대에서 내노라하는 부자 농민, 즉 쿨락이 될 수 있었다.

레온 트로츠키, 본명 레브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은 다비드의 둘째 아들로 1879년에 태어났다.

급진적인 나로드니키 조직인 '인민의지'가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결의했던 해였다.

이후 점점 반동적으로 흘러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세와는 상관없이, 어린 료바(레브의 애칭)는 유복한 가정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다.

두뇌도 유달리 명석하여, 부모는 그가 큰 인물이 될 거라 생각하고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명석했기에, 주변 환경의 모순과 문제점을 일찍부터 깨닫기 시작했다.

'왜 우리 유대인들은 사람들의 놀림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해도 관리가 되지 못할까?' '왜 아버지는 소작인들과 일꾼들을 때리고 욕하며 짐승 다루듯 할까? 저들이 일하는 덕분에 우리는 안락하게 사는데?' 그런 인식은 스펜체르라고 하는 외가 쪽 친척 청년이 찾아오면서 더욱 발전했다.

의식 있는 대학생이었던 스펜체르는 료바에게 고등 수학과 외국어를 가르쳐줄 뿐 아니라 푸시킨과 네크라소프의 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등도 알려주었다.

아직도 구체제의 사슬에 묶인 러시아 민중의 비애,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그늘에 가린 영국 민중의 고통을 어린 료바는 철저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눈물을 흘리며 감명받았다고 한다.

이로써 트로츠키가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하면 과장이겠으나, 부자 농민의 자식으로 편안하게 살기보다는 뭔가 가슴을 뛰게 하는 사명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불태우겠다는 결의가 이때 싹텄다.

그런 료바를 좋게 본 스펜체르도 부모님께 말씀 드려 그를 오데사의 집에 묵게 하면서 더 많은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트로츠키의 평생에 걸친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8세 무렵의 레브 브론슈타인(트로츠키) <출처: en.wikipedia.org>

 

 

사회주의자가 되다

오데사의 실업학교에서 6년 동안 최우등생으로 수학한 뒤, 료바는 니콜라예프의 김나지움에 편입했다.

17세를 넘긴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만큼 당시 '유행'하던 반체제 사상과는 거리를 둔 채 홀로 사상의 탑을 쌓고 있었다.

모두들 인민주의나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틈에서 "나는 벤담주의자다"라고 말하거나, 노동조합 운동의 선구자인 라살을 가장 존경한다고 하는 등 '분위기를 썰렁하게' 하곤 했다.

그는 특히 사회주의를 싫어했는데, 인간을 지나치게 환경의 산물로 보는 사고방식이 개인의 자유와 발전 의지를 굳게 믿었던 그의 생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히도 그가 하숙을 치고 있던 집 가족과 하숙생 동료들이 모두 열렬한 사회주의자였으며, 그들의 권유에 못 이겨 나가 본 사회주의 모임인 '과수원회'에서 알렉산드라라고 하는 매력적이고 지적인 여성을 만나면서 운명은 바뀌게 된다.

그는 특유의 달변과 송곳 같은 논리로 그녀를 논쟁에서 이기려고 들었지만, 워낙 탄탄한 이론적 기반을 쌓고 있던 그녀에게는 번번이 패하곤 했다.

그래서 료바는 조바심이 났는데, 어느새 그 감정이 동경과 애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하여 약 1년 뒤, 그는 알렉산드라의 남자친구이자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일단 사회주의에 입문하자, 료바는 순식간에 모임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던 그의 글솜씨와 말솜씨 덕분이었다.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대개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글만 썼던 데 비해 료바의 글은 문학성이 풍부했고, 그의 웅변은 누구라도 들뜨게 만들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가 쓴 "나세 델로(우리의 대의)"라는 유인물은 니콜라예프의 노동자들 사이에 붐을 일으켰고, 그에 따라 경찰 당국도 놀라서 주동자의 색출에 나섰다.

1898년 1월에 료바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과수원회 동지들은 체포되었고, 1899년에는 시베리아로 유배형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낙담했으나, 이제 20대에 접어들고 있던 료바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이제 그는 그토록 염원했던, 일생을 아낌없이 바칠 사명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옥중결혼을 한 알렉산드라도 있었다.

사회주의에 입문하던 무렵의 트로츠키 <출처: en.wikipedia.org>

 

 

레닌과의 대립

20세기로의 전환을 시베리아에서 맞은 료바는 사회주의를 철저히 공부하고 필명으로 글을 발표하며, 아내와 어린 두 딸을 위안 삼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이 주관하던 잡지 <이스크라>를 보고는 "지금 한창 혁명이 진행 중인데, 이런 곳에서 썩고 있다니!"하며 조바심을 냈고, 그런 그를 보다 못한 알렉산드라가 그에게 홀로 탈출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1902년 여름에 레닌과의 연락을 마치고는 탈출, 시베리아를 거쳐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거쳐 레닌이 있던 영국까지 갔다.

이 때 여권을 위조하면서 무슨 이름을 쓸까 고민하던 그는 오데사 감옥에서 그를 무척 괴롭혔던 간수의 이름을 적었는데, 그것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사자를 뜻하는 '레온'은 그의 본명인 레브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세출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마침내 탄생한다.

1902년 10월에 트로츠키를 맞아들인 레닌은 그의 예리한 지성과 탁월한 글솜씨를 높이 평가하고, 아직 23세일 뿐인 그를 <이스크라>의 편집위원에 앉히려 했다.

그러나 원로급 사회주의자였던 플레하노프의 반대로 무산되는데, 이로부터 플레하노프와는 평생 불편한 사이로 남는다.

반면 마르토프, 악셀로드 등과는 친해졌는데, 그것은 그 두 사람이 트로츠키와 같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한몫 했다.

레닌의 경우에는 많은 점에서 사상적으로 동의하기는 했어도, 그의 성향에 왠지 공감이 덜 갔다.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과 굳이 잘 지내려 하지 않는 것이 트로츠키의 어릴 때부터의 특성이었고, 그는 결국 그 특성 때문에 비싼 값을 치르게 된다.

유럽 생활은 트로츠키에게 새로운 인연도 가져다 주었다.

나탈리아라고 하는 유학생과의 만남이었는데,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끌렸으며 트로츠키는 결국 시베리아에서 기다리고 있는 알렉산드라에 대한 죄책감은 뒤로 하고, 나탈리아와 새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계속 알렉산드라가 그의 부인으로 남아 있었다.

좌로부터 트로츠키, 레닌, 카메네프. 1919년의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은인이자 후원자, 그리고 혁명운동의 선배였던 레닌과의 대립은 1903년 여름에 빚어졌다.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당의 전당대회가 브뤼셀에서 열렸는데, 당시 쟁점은 당에서 일정 비중을 차지하던 유대인 동맹과 나로드니키 세력과의 관계 설정 문제였다.

유대인 동맹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지분을 인정해 달라고 했고, 나로드니키는 당이 마르크스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스스로 유대인임에도 레닌의 입장에서 이 두 분파를 맹렬히 공격하여 '레닌의 곤봉'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나, 그 다음에 그리 큰 문제도 아닐 수 있었던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당헌 수정 검토 때 레닌은 혁명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당원자격을 제한하자고 했고, 마르토프는 간접적 참여자에게도 당원자격을 주자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트로츠키가 마르토프 편을 들며 레닌을 맹비난했던 것이다.

문제는 당원자격 문제 자체만이 아니라, 레닌이 <이스크라> 편집진에서 트로츠키와 친했던 악셀로드와 자슬리치를 빼려고 했던 것에서도 불거졌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레닌을 트로츠키는 불신하게 되었고, 앞서 스스로 "혁명운동은 엘리트 중앙위원회가 통제하여 체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같은 입장이던 레닌의 지지를 얻었지만, 이제는 그런 레닌의 입장이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 하는 술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불거졌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레닌을 "방탕한 인간" "악랄하고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자" 등등으로 인신공격까지 하며 몰아세웠다.

졸지에 '배신당한' 레닌은 <이스크라>에서 물러나고, 전당대회도 흐지부지된다.

여기서 레닌에 동조했던 사람들을 '볼셰비키'로, 그 반대파를 '멘셰비키'로 부르는 유래가 생긴다.

 

 

혁명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다

하지만 레닌이 떠난 <이스크라>, 당시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권의 사실상 사령탑이던 <이스크라>는 플레하노프의 독무대가 되었으며, 그가 평소 눈엣가시로 여기던 트로츠키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결국 1904년 4월에는 트로츠키도 <이스크라>를 떠나고, 그 해 9월 편지에서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와도 결별한다.

하지만 레닌과 관계를 개선하려 하지는 않았고, 러시아 혁명이 최종 국면에 달하기 직전까지도 스스로를 '볼셰비키'라고 부르는 일을 거부했다.

이처럼 혁명가들이 분열에 시달리고 있는 사이에 본국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패배가 가져온 충격과 요승 라스푸틴과 관련된 추문 등으로 왕실에 대한 지지가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1905년 1월 9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평화시위가 잔혹하게 무력 진압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민심에는 불이 붙었다.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벌이고, 지방에서는 소작농들이 지세 납부를 거부하고, 이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시위대에 합류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 누구보다도 빨리 귀국하여 혁명운동 지도에 나선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의 사자후를 처음 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열광했다.

트로츠키는 효과적으로 민중을 선동했을 뿐 아니라 효과적인 전술도 제시했다.

교조주의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망설이는 가운데 그는 노동자들만의 힘으로 혁명을 하기는 역부족이라 농민, 군인과 연대해야 한다고 했으며, 당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노동자 대표회의, '소비에트'를 중시하고 그 부의장이 되어 활약했다.

이는 이후 볼셰비키 혁명의 기본 전술이 된다.

1905년 12월, 트로츠키의 지휘로 소비에트는 무장봉기에 나섰으나 황실 근위대에게 진압되고, 트로츠키도 체포된다.

이를 '제1차 러시아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베리아로 다시 유배된 트로츠키는 얼마 후 다시 탈출하여 유럽으로 갔으나, 봉기의 실패에 실망했던지 한동안 정치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으면서 언론과 저술 활동에 주력했다.

그 사이에 로자 룩셈부르크, 카우츠키, 조레스, 힐퍼딩 등 유명한 유럽 사회주의자들과도 만났다.

스탈린과도 이때 처음 만났는데,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이미 서로에게 나쁜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거만하고 현학적이라 보았으며,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음험함과 지나친 냉혹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이 필생의 숙적이 될 줄이야 그때는 미처 몰랐겠지만.

 

 

10월 혁명과 트로츠키

움츠러든 혁명의 기운은 또 한 차례의 전쟁 덕에 부활했다.

1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광은 없고 막대한 희생만 거듭되는 전쟁.

게다가 병사의 대부분은 농민이었기에 내버려둔 농사를 짓기 위해 전쟁 종결을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왕실은 전쟁을 고집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까지 식량이 고갈되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 노동자가 봉기하고 군인들이 합세하여 궁궐을 습격, '2월 혁명(신력 3월)'을 일으켰다.

이로써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정권은 바뀌었으나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했다.

한편 트로츠키와 볼셰비키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일관성 있게 반전 운동을 벌였으며, 이를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긴 독일은 레닌 등을 비밀리에 러시아로 잠입시켰다.

1917년 4월,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여 전쟁을 중단할 것,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돌릴 것 등을 천명했다.

볼셰비키의 승리를 그린 쿠스토디예프의 그림(1920)

 

이번에는 레닌보다 한 발 늦게 러시아로 돌아온 트로츠키(하지만 그의 명성은 아직도 자자해서, 기차역에 내린 그를 민중들이 환호 속에서 무등을 태우고 숙소까지 옮겼다)는 레닌의 노선에 대체로 동조했으되, "마르크스주의 교리상 농민은 한때의 파트너는 몰라도 궁극적인 혁명 주역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세워 노동자-농민 국가를 건설하려는 볼셰비키와 마찰을 빚었다.

아무튼 사태는 논쟁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7월에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전쟁 중단, 임정 해체' 등 4월 테제의 내용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자, 케렌스키는 볼셰비키를 탄압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다시 달아났으나 트로츠키는 체포되었으며, 그는 이때부터 스스로를 볼셰비키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다시 9월에 케렌스키가 신임했던 코르닐로프가 왕정 부활을 외치며 반혁명에 나섰다가 패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임시정부는 크게 흔들렸는데, 트로츠키는 이를 놓치지 말고 봉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현 단계의 러시아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며, 아직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잡을 때는 아니다"는 일부 교조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붉은 군대를 동원해 임정을 공격했다.

1917년 10월 25일, 러시아 혁명은 마침내 성공했다.

1919년. 폴란드 전선에서 붉은 군대를 지휘하는 트로츠키. <출처: en.wikipedia.org>

 

혁명 성공 직후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인민위원회 의장이 되어 새 정권의 수반이 될 것을 제의했다.

1차 러시아 혁명의 주역인 데다 10월 혁명(신력 11월)에서도 중심 역할을 맡았던 트로츠키는 사실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사양했다.

그는 이론가나 전략가는 몰라도 통치자로서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레닌은 그러면 내무인민위원을 맡으라 했으나, 트로츠키는 '소수민족 문제를 다루어야 할 텐데, 유대인인 나로서는 부적절하다'며 역시 사양하고, 외무인민위원이 된다.

그리하여 볼셰비키의 공약에 따라 독일과 전쟁을 종결 짓는 대표로 나서며, 1918년 2월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는다.

이로써 러시아는 전쟁에서 벗어났으나 종전 조건이 너무도 가혹했기에(서방 영토의 약 사분의 일을 독일에게 내주었다) 볼셰비키 내에서도 조약 파기 목소리가 나왔다.

협상 대표였던 트로츠키에 대한 비난도 쏟아졌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군사인민위원이 되어 붉은 군대의 증강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 미국, 영국 등이 후원하는 반혁명군이 도처에서 신생 소비에트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절대절명의 문제였다.

그래도 잡음이 많았다.

군인들은 소비에트군 특유의 '정치장교'가 군사작전에 참견하는 상황을 버거워했고, 당에서는 옛 정권의 장교들이 붉은 군대의 장교로 복직하는 일에 분개했다.

트로츠키는 "이 어려운 때 나라를 지키기로 결심한 장교들은 말만 앞세우는 가짜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훌륭한 인민의 벗이다!"라고 말하며 옛 장교들의 복직을 밀어붙였고, 장교들의 불만은 직접 병영을 방문하고 토론하며 풀어갔다.

그리하여 그가 인민위원이 될 때 수천에 불과했던 인민군은 2년여 만에 5백만으로 늘었고, 1919년 10월에는 반혁명군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모스크바로 개선했다.

그는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적기 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는 실로 트로츠키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때였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별로 공로도 없던 스탈린에게도 똑같은 훈장이 주어진 일을 의심했다.

레닌은 자신을 견제하고자 충복 노릇을 하고 있던 스탈린을 키워주는 것일까?

 

 

숙청, 방랑, 암살

사실 영광에 싸여 있던 트로츠키의 뒤에서는 그를 시기하고 불신하는 목소리가 날로 늘어갔다.

거만하고 현학적이라는 인상, 거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쏟아내는 독설은 그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도록 했으며, 유대인이라는 인식도 빠지지 않았다.

그가 군사 부문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자 "나폴레옹이 되려는 건가?"라는 의심까지 불거졌다.

이런 의심과 불신을 조장하고 있는 핵심은 다름아닌 스탈린이었다.

두 사람은 정치이념에서도 첨예하게 맞섰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며 일부 교조주의자들의 말과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을 거치지 않고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체제는 세계가 자본주의에 머무르는 한 오래 버틸 수 없으며 반드시 유럽을 비롯한 세계 혁명이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스탈린은 러시아가 사회주의 체제로 충분히 지속할 수 있으며, 세계혁명은 먼저 소련 체제를 안정시킨 다음의 문제라는 '일국사회주의론'을 내세웠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던 레닌이 1922년 말에 쓰러져서 1924년 1월에 죽자(그는 두 사람 중 누구도 소련의 전권을 쥐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겼고, 최종적으로는 스탈린을 더욱 불신했다고 한다), 트로츠키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되었다.

스탈린은 레닌을 신격화하면서 자신을 그 충실한 추종자로 부각시키는 한편, 트로츠키는 과거에 레닌과 대립했었고, 최근까지도 영구혁명론 등을 내세우며 레닌의 노선을 부정했다고 공격했다.

트로츠키도 지지 않고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과 힘을 합쳐 스탈린에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1925년에는 요직에서 해임되고, 1926년에는 정치국에서 추방되며, 1927년에는 당에서 제명, 1928년에는 세 번째로 시베리아 유형, 그리고 1929년에는 국외추방되고 말았다.

 

만년의 트로츠키. 암살되던 1940년 멕시코에서 <출처: en.wikipedia.org>

 

 

"방랑하는 유대인"은 트로츠키의 숙명이었을까.

피땀 흘려 이룩한 새로운 조국에서 쫓겨난 그는 이후 십여 년간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등을 돌며 생활했다.

유랑 중에도 [배반당한 혁명] 등의 저서와 논평에서 스탈린 체제를 공격하고 "지금의 소련은 올바른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다"고 비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기에 응하여 스탈린도 국내의 트로츠키 지지자들을 남김없이 숙청하고 외국에도 압력을 넣어 트로츠키가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게 했으며, 심지어 유럽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트로츠키의 자식들을 차례차례 암살했다.

최종적으로 멕시코의 코요아칸에 머무르던 트로츠키는 화가 프리다 칼로와의 로맨스로 잠시 위로받기도 했지만, 자식들에 이어 자신에게도 스탈린의 마수가 뻗쳐옴을 느끼고 있었다.

1940년 5월의 암살 시도는 모면했으나, 8월 20일에는 피하지 못했다.

오래 전부터 그의 추종자를 가장하며 곁에 머물러 있던 스탈린의 하수인, 라몬 메르카데르가 그의 뒤통수를 피켈로 내리찍은 것이다.

하루 만에 숨을 거둔 그는 코요아칸에 묻혔다.

소련이 건재한 동안 트로츠키는 늘 저주받은 이름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결합을 불신하고, 영구혁명을 주장하는 그의 사상은 '트로츠키주의'라 하여 대표적인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며, 그는 다시 각광을 받게 된다.

토니 클리프, 에르네스트 만델, 크리스 하먼 등이 "사회주의는 끝났다"는 주장에 맞서 "소련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였지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었다"면서 트로츠키의 분석과 시각을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입장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면서 사회주의의 부흥을 꿈꾸는 사람들의 의지가 되고 있다.

비록 그들이 트로츠키의 사상을 곧이곧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트로츠키가 암살된 그의 서재 <출처: en.wikipedia.org>

 

상가로서는 오랜 영향을 남겼으되, 정치인, 다시 말하면 자연인인 트로츠키의 운명은 비참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그는 더할나위 없는 모범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마다 스스로에게는 악수를 거듭했다.

일찍이 레닌과 '불필요한' 대립을 했던 것은 차치하더라도, 10월 혁명 직후 정권을 쥘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스탈린처럼 레닌의 충복을 자처하거나, 체 게바라처럼 훌훌 털고 떠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레닌 사후에도 소련에 남아 스탈린과 겨루었으며, 추방된 후에도 승산 없는 싸움을 거듭했다.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전략의 천재가 정작 자신의 앞가림은 제대로 못했다고 할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생에 후회가 없었을지 모른다.

우크라이나의 농장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그는 무엇이 되느냐보다 무엇을 하느냐를, 권력을 쥐기보다 혁명을 성취시키기를 바랐을 테니까.

 

 

글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발행일 2011.10.19

 

출처 : 네이버캐스트 - 레온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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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중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