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가 언제는 자유롭지 않았었어? †
어제는 가정법원에 들러서 '협의이혼'이라는 이름을 빌려 아내라는 여인과 갈라서는 걸 확정하기로 한 날이었어요.
조금이나마 설렜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잠들었다가는 아침에 늦어버릴 것 같은 걱정이 더 컸답니다.
그러했기에 그저께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을 맞았답니다.
아침이 되자 가정법원 자리가 꽤 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의 교통 시간은 얼마쯤 될지 궁금해지고 다급해지더군요.
며칠 전 법원에서 그것 신청했을 때 거기 법원에 다시 들리라는 시각이 어제 아침 아홉 시 반으로 잡혔거든요.
그 시각까지 들어가려면 집 근처에서 최소한 한 시간 반 전에 택시에 올라야 가능할 걸로 짐작만 하고 있었으니까 셔츠를 걸치면서 조금은 다급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컴퓨터를 켜고는 '다음 지도'를 펼치고서 '광주가정법원'을 검색했답니다.
그러고는 '출발'과 '도착'을 우리 집에서 그쪽에 맞추어 교통 시간을 둘러봤어요.
아 그랬더니 한 시간 반이라는 제 추측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극초 단시간 달랑 15분으로 검출합니다.
판사 앞에서 기죽지 말고 할 말을 당당하게 하고 오라는 어머니 성화는 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뱃속이 든든해야 풀죽지 않는다면서 뭐라도 먹고 가라고 계속하여 보채시었지요.
저녁에 맘먹을 때부터 아침은 거르기로 작정한 터라서 그 성화가 어머니의 지극한 간청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그대로 있다간 성화를 못 견딜성 싶기에 집 밖으로 나와서 머잖아 곧바로 택시에 올랐는데 그 시각이 아침 8시 반 정도밖에 안 됐을 시각입니다.
법원 앞에 들어설 때까지 그 택시 기사님이 이혼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설득합니다.
인터넷에서 봤던 대로 딱 15분 만에 도착한 것도 아니고 5분 정도는 더 걸리더군요.
선의의 뜻으로 기사님 말씀하셨겠지만, 그도 저로선 스트레스로 다가오기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괜히 제가 먼저 꺼냈다가 그 봉변 당하는 거 같아 후회됐답니다.
아홉 시도 안 되어 법원의 아무 출입문이나 들어섰더니 직원 한 명이 나오더니 그 자리를 나가서 다른 길을 통해 가라며 일러 줍니다.
그렇게 돌아서 들어갔는데 강당쯤으로 보이는 어느 어두컴컴한 빈방에 앉아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또 누군가가 다가와서 '협의이혼' 탓에 왔느냐고 물으면서 새로운 방을 소개합니다.
물론 사전에 가져간 설명서에도 그 모든 게 다 나왔지만, 그것 쳐다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저는 아무 자리에나 걸치고는 쉬고 싶은 탓에 그렇게 여러 번 제지와 안내를 받았던 거지요.
저에게 안내를 마치자 안내했던 그 직원 불을 켜두고서 나가는데 어두컴컴했던 그 자리가 훤해서 좋습니다.
1
아무도 없는 그곳에 홀로 있으려니 갑자기 정신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데요.
2
그래도 오늘 드디어 홀몸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냥 흐뭇해졌던 건 사실입니다.
3
한참을 기다렸는데 이윽고 비슷한 처지의 '협의이혼' 후보들이 우르르 들어섭니다.
대략 스무 쌍쯤 됐을 겁니다.
저와 짝을 이루어 헤어질 그녀도 몇 번의 통신 끝에 드디어 다가옵니다.
반갑게 인사하고는 결정을 기다렸지요.
시간이 지나자 담당자가 나와서 차례로 처리한다며 부부를 짝으로 해서 번호표를 나누어 줍니다.
우리 부부는 세 번째 불렀었는데 두 번째 부부가 대답하지 않기에 그 번호표의 주인이 되었지요.
4
그런저런 것들을 아홉 시 반에 시작했는데 한참이나 그 자리 대기실에 세워두더니 10시 반쯤이나 됐을 때쯤에 놈(판사)이 업무를 개시합니다.
분통이 터졌지만, 이 좋은 날 커다랗게 내지를 수도 없고 해서 주위에서만 간신히 들리게끔 몇 번이나 욕설 반 불평 반으로 중얼거렸답니다.
막상 차례가 되어 판사 앞에 섰는데 그 처리 시간은 대략 2~3십 초 남짓이 걸렸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끝내고는 판사로부터 이혼 확인증을 받아드니까 허탈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뿌듯했지요.
그래도 구청에 들러서 신고를 마쳐야 이혼이 성립한다기에 택시에 올라서 가장 가까운 쪽 구청으로 가자고 했더니 '북구청' 청사로 실어다 줍니다.
제가 광주에 살면서도 구청에 들릴 일은 거의 없었는데 너무나도 오랜만에 들린 거 같더라고요.
그것도 제 사는 곳도 아닌 다른 동네 구청에 들렸던 거라서 새롭습니다.
거기서는 아까와 달리 5분 남짓이 걸렸을 겁니다.
그것도 서류에 부모 이름이나 주소 그딴 것들 쓰느라고 들어간 시간입니다.
쓰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으니까 도우미가 다가오더니 꼭 써야 할 곳을 짚어줬기에 그나마 빨리 끝났던 겁니다.
어제는 이혼하려고 집 나섰을 때부터 하늘이 우중충했었는데 법원을 나설 때쯤엔 제법 굵은 빗방울이 들기였습니다.
갈라선 아내가 그래도 아파트 앞까지 따라왔어요.
그리고는 상가 제과점에 들리더니 시어머니기도 했던 우리 어머니 달라며 빵을 한가득 담아줍니다.
제과점을 나오면서 한번 안아보자고 그랬지요.
꼬박 7년 만입니다.
그것도 아내가 아닌 갈라선 여인으로서 말입니다.
'이리 와봐~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보게~'
참 푸근했지요.
늘 그놈이라고 불렀던 그녀의 남자에게도 어제만큼은 이름을 부르면서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고생 참 많았다!!!'
'왜? 무슨 고생을 말이야?'
'응. 당신과 사느라고 말이지.'
자꾸만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걸 그녀가 건널목에 푸른 등이 들어와서 건너가고도 옷자락 한 올 안 보일 때까지 머물렀다가 들어왔답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마지막으로 안았던 그녀의 그 품이 떠나지 않고 너무도 달콤합니다.
법원에서 판사로부터 그것 확인증을 받으면서 제가 그랬거든요.
'와~ 드디어 나 자유인이 됐다!!!'
'자기가 언제는 자유인이 아니었어?'
그 순간 그녀가 곧바로 되물었지요.
그녀는 몰랐을 겁니다.
그녀가 떠나 있었던 7년 세월 제가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완전히 잊을 수 없었다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여인을 떠올릴 때마다 뇌리의 한쪽으로는 터부의식·죄책감 그런 것들이 따라다녔거든요.
때론 그녀가 미웠고 증오스러웠기에 그럴 때에도 그런 따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었답니다.
'투쟁'이나 '합의'를 생활신조로 살았었던 그때에 그녀를 만나 사랑했었고 나누다가 헤어졌기에 제 뇌리엔 그녀와의 약속을 깨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찼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강박관념이 그녀가 떠나 있었던 세월 내내 저를 속박했었기에 그토록 힘들었을 거예요.
어제 판사가 제게 전해준 쪽지 한 장은 단순한 협의이혼 확인서가 아니라 '7년 투쟁 합의문'이요, '부당속박 해탈서'이며 나아가 '자유로운 인간 확정 선언서'가 될 것입니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면서 제 영혼이 몹시 맑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막상 어제가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혼하고 나면 몹시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었는데 실제에선 딴 판입니다.
그 기나긴 시간 또 다른 한편에선 마음의 준비를 이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도 평안할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이런 평화로움도 끝내는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당장에 닥칠 관리비며 건강보험료 날씨는 춥다는데 전기세는 더 나올 테고 또 올랐다고 하니까 더더욱 가파르겠고…
보일러는 또 얼마나 낮은 온도에 맞춰야 할지…
그런 것들이 고지서로 날아오면 지금의 이 호사로운 '영혼의 휴식'을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때는 그때 가서 보면 될 것이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취하고 싶네요.
아~ 중저음 바리톤으로 속삭일지도 모르는 이 영혼의 숨소리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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