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오로지

헝겊으로 허리끈을 찼더니…

중근이 2014. 1. 4. 16:10

♬ 헝겊으로 허리끈을 찼더니… ♬

 

그것 처음으로 봤던 아주 옛날부터 생각이야 있었지만, 어젯밤에 처음으로 차 보았습니다.

헝겊으로 찬 '허리끈'을 말입니다.

 

인천 어디에서 자그마한 골판지 공장을 한다는 저의 사촌이 있어요.

거기서 직원으로 있는 또 다른 사촌 누님이 있는데 그분이 오래전부터 시골 작은아버지 댁에 자주 보낸다는 헝겊이 있었거든요.

공장에서 난다면서 자투리 헝겊을 보내는데 그게 너무도 길고 질겨서 끈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기에 시골에서 농사짓는 작은아버지께서는 매우 반기셨나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돌고 돌아서 광주에 있는 우리 집에까지 자주 올라오곤 했답니다.

 

이유는 해마다 철철이 추수가 끝나면 그때마다 나오는 농산물(쌀이나 고구마 그 밖의 잡곡들 등등)을 틈틈이 보내시는 겁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부칠 돈이 없으니까 착불로 보낸다면서 택배를 써서 그랬거든요.

자기 땅도 없이 남의 땅을 빌려 그곳에서 지으시면서 보내주시니 그 고마운 맘 오죽이나 크겠습니까?

고맙지요. 너무나도 우리 작은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러고 바로 그런 순간에 농산물 담은 마대 묶었던 끈이 바로 그 헝겊 끈이었거든요.

그렇게 돌아서 왔던 게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끈을 허리끈으로 써보고는 싶었지만, 너무도 꼬이고 꼬여서 적절하지는 않더라고요.

 

그러던 차 최근에 작은집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도 그 끈을 보내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필요할 때 쓰려고 어머니께서 그것 깊숙하게 넣어두었을 뿐이지 그간 안 보냈던 건 아니란 걸 최근에야 아주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었네요.

어머니는 제가 일상에서 그런 따위 헝겊 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단 걸 모르셨을 겁니다.

가령 침대에 뭔가를 묶어야 할 때 또는 늘 앉아 있는 컴퓨터 걸상 등판에 허리를 받혀줄 베개를 묶어야 했을 때 등등이 많거든요.

그래서 그때 어머니한테 그따위로 쓸 일이 많다며 달라고 했더니 한 뭉텅이 내놓았답니다.

 

그렇게 얻은 헝겊 끈으로 별짓을 다 했었지요.

그러다가 어젯밤엔 문득 허리며 아랫배가 몹시 불편한 걸 깨달았지요.

어제뿐만 아니라 늘 그랬었는데 어젯밤에 유달리 많이 느꼈을 뿐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겨울철엔 혁대 두른 바지가 아랫도리에 그대로 일 때가 매우 많습니다.

쉽게 말하면 추워서 그렇습니다.

겨울철 꽉 닫아버린 방안의 실내온도가 20도를 밑돌 때가 많거든요.

자동으로 돌아가는 보일러 온도를 15도에 맞춰두면 어지간해서는 돌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안팎에서 기침이라도 나올라치면 잽싸게 눈치 긁고서 보일러를 때곤 했습니다.

우리 집엔 저뿐만이 아니고 어머니와 막냇동생도 있거든요.

여든이 낼모레인 어머님의 잔병치레는 일상사지만, 감기라도 심하게 앓게 되면 그야말로 큰일이 날 수밖에 없지요.

전기장판이 깔렸다곤 하지만, 그것하고 '건강을 지켜낼 만한 적당한 실내온도'하고는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보일러를 켜서 '그 온도를 맞추려고(?)' 나름대로 해 왔었습니다.

 

허리끈 이야기하다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이것을 매자마자 사실은 아버지부터 떠올랐지요.

1976년 그해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가을 운동회'의 마지막 총연습을 하는 중이었는데 누군가가 찾아왔었지요.

아버지가 위험하다네요.

 

대략 3년 전부터 병세가 일어나 늘 골골하시면서 간신히 버텨오신 분이셨는데 그래도 그 어려운 몸으로도 들일도 나가시고 바닷일도 어렵사리 해 오셨던 분이시거든요.

그렇게 찾아갔는데 아버진 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시간 동안 꿈쩍도 않고 계시다가 별안간 엄청나게 커다란 깊은숨을 토하시고는 또다시 정적에 들어가셨던 아버지.

바로 그 아버지가 임종 기다려 급하게 찾았던 모두가 지쳐서(?) 돌아간 한참 뒤 저 홀로 남았는데 그렇게 격렬하지도 않은 여태처럼 그렇게 커다랗게도 아닌 작고 짧은 경련 하나로 마지막을 알려주셨답니다.

 

낫살을 열넷이나 먹었건만 사람이 실제로 죽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몰려가 부잣집 마당에서 보는 '차범근의 축구'나 '김일의 박치기'나 '고갯짓 한 방으로 북한놈 싹쓸이했던 전우'에서나 봤을…

바로 그 '전우'에서 북한놈이 죽는 건 텔레비전에서 봤긴 했었지만, 그렇게 극적이지도 않고 너무나도 조용히 이 세상을 마감하는 거가 전 믿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좀 이상하다고 바깥으로 소리치고는 공동묘지 무덤 안으로 꾹꾹 묻힐 때까지도 눈물 한 방울은 고사하고 우는 시늉마저 해보지 못했답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버지가 차시던 허리끈이 바로 헝겊으로 되어 있었답니다.

선거로 뽑는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같은 나리들이 선거철이 되면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떠벌리지요.

그래놓고는 당선이 확정되면 곧바로 머슴이기는커녕 국민의 왕으로서 그냥 왕이 아니라 폭군으로서 국민 알기를 제 놈 손톱에 때만큼도 안 여기는 이름 그것이 '머슴'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녔을 때만 해도 집 주변 부잣집 들엔 그 머슴이 있었습니다.

아까 말한 작은아버지께서도 일찍부터 머슴이었는데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그 순간도 머슴이었기에 연락 안 되어서 찾아뵙지도 못했었고요,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훨씬 이전부터 머슴이셨답니다.

여러 고을 부잣집을 옮겨 다니다가 어느 해는 우리 어머니 친정 마을 뉘 댁에서 머슴을 사셨답니다.

어찌나 우직하고 부지런하셨던지 멀리서 가까이서 지켜보셨던 우리 외할아버지 눈에 쏙 들었다네요.

그 덕에 울 어머니 동네에서 늘 봤던 머슴의 각시가 되었더래요.

 

지금도 가끔 어머닌 할아버지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 중에서도 너무나 대단한 부자였답니다.

논밭이 많아 누구나 알아보는 겉치레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그야말로 엄청난 부자였기에 그것이 문제였던 겁니다.

옛말에 그런 것 있죠? '청렴결백'

식 올리고 처음으로 친정아버지가 시댁을 찾으셨는데 내놓은 밥상에서 집어 먹을 거 하나가 없어서 속이 터졌다네요.

속아도 너무도 크게 속았다면서 화가 치밀어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빠져나온 뒤 그 뒤로 뒤도 안 돌아보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답니다.

'부자가 망해도 저 먹고살 것은 남긴다는데 세상에 어찌 그렇게 망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제 친할아버지 실지로는 물리적으로도 한 때는 부자였었다는데 어쩌다가 폭삭 망했답니다.

그러했음에도 어머니 몸에 큰 화를 입어 오랜 세월을 죽을 고비에 있었는데 자상하신 그 할아버지 덕으로 살아나셨다고 여전히 칭송하시지요.

저도 외할아버진 어머니 시집보낸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기에 기억할 순 없지만, 친할아버지는 아버지보다도 더 오래 사시다 가셨기에 그 인자한 용안을 기억하지요.

 

아버지 그 아버지 어쩌다가 큰 행사(계 치는 날, 마을을 벗어나 외출하는 날)가 있는 날이면 보물처럼 깊숙하게 묻어두셨던 좋은 옷과 그 흔한 헝겊 허리끈(곤말 끈)이 아닌 짱짱하고 뻣뻣한 갑띠(현대판 허리띠라고도 하고 요즘 말로는 벨트라고도 부르지요.)를 맸던 게 생각납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그 허리끈을 제가 메어 봅니다.

돌아가실 때의 그 아버지보다도 열살 가까이나 더 먹은 건 사실이지만, 제 허리 너무도 통통합니다.

아니 나잇살(X배)이 너무도 과분하게 쪄버렸네요.

- 살들아~ 내 살들아 제발 좀 외출해다오. 다시는 절대 돌아오지 말아다오. -

 

Sunsh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