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오로지

고향 땅 바닷바람·산바람을 마시고 오다.

중근이 2013. 8. 4. 17:38

† 고향 땅 바닷바람·산바람을 마시고 오다. †

 

8월이 시작하자마자 고향 갈 일이 있었습니다.

큰 숙부님 기일을 맞이해서 형제들이 모두 만나자고 했었는데 어떤 사연이 있었던지 일부는 못 만났네요.

날씨가 궂었기에 나름 서둘러서 내려가긴 했지만, 인천의 누님이나 부산의 큰형님은 우리보다도 하루 먼저 와 있습니다.

제사는 어차피 저녁에 모실 일이었고 낮에는 준비한 토론 함께할 시작할 분위기도 아니기에 누님에게 바람이나 쐬자고 꼬드겼지요.

그 일로 누님을 비롯한 조카와 운전사인 막냇동생 그리고 저를 포함한 넷이서 바닷가로 향했답니다.

이따금 시골에 들르면 제 살았던 집이 바닷가에 있었으니까 바다에 대한 호기심은 들지도 않았었지만, 어렸을 적에 다녔던 초등학교(풍남초등학교)가 있는 마을 그것도 그곳에 딸린 항구(풍남항)에는 좀처럼 가볼 일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가보고 싶었거든요.

 

그곳에 가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나루터의 나루터도 특이한 구조를 가진 놈 포함해서 두 개나 있었고 그 규모(수백 m)도 대단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거기 부두가 우리 마을보다는 컸었지만, 그래도 지금 규모에 비하면 백분지 일도 안 되었을 겁니다.

제 살았던 집이 선착장의 시작점에 있었던 거처럼 제 친구네가 하던 '석유 파는 집' 그곳 선착장의 첫머리에 있었는데 녀석의 안 집은 마을 안으로 으리으리한 풍채를 가졌더군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가까운 친구라면 누구나가 너나들이하듯이 저도 한번은 하교 시간에 녀석 집으로 따라갔답니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밥에 참기름 넣고 깨소금 버무려 비벼 먹기도 하는 '꿈의 식사법' 보았었지요.

당연히 친했으니까 녀석이 먹어보라고 권했겠지요.

제가 그걸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그건 확실히 모르겠지만, 제 고등학교 다니면서 자취했을 때 콩기름에 밥 볶고서 간장으로 간을 해서 그 비슷한 모양새를 흉내를 내서 먹곤 했던 그거는 기억납니다.

 

그곳 기다란 방파제 맨 끝에 세운 등대에 기대어 사진을 박고선 슬슬 들어왔다가 오후엔 또 다른 큰 숙부(인천 누님의 선친)님의 산소를 찾아 길을 떠났답니다.

거기 시골에 돌아가신 어르신의 산소나 제사 대부분은 작은 숙부님이 도맡다시피 해서 그 길도 그분이 앞장서서 걸었건만 그 길이 여간 곤란해야지요.

일흔다섯이나 되는 숙부님은 관절이 안 좋아서 죽을 힘을 다해 겨우겨우 움직이십니다.

제 어렸을 적 초등학교 등하굣길이었던 그곳 차도는 잡초가 무성해서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바닷가 절벽 위로 난 길이기에 자칫 발이 삐끗했다간 또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지 땀이 버쩍버쩍 나더라고요.

저는 광주에서 떠날 때부터 삔 발목이 아플 것을 다짐했기에 간간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 짧게 쏟아내곤 했지만, 제가 각오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발바닥이 아팠답니다.

그래도 모두가 만류한 것을 뿌리치고서 따라 나선 처지였기에 꾹 참고서 마침내 산마루에 올라 모두 한숨 돌릴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는 등산화 밑으로 자갈 조각이 들어간 줄 알고 얼른 신발을 벗고서 털어봤지요.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네요.

다시 들고서 비틀고 구부려 봤더니 세상에 글쎄 등산화 밑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터졌지 뭡니까?

거기서부터 재를 넘어 큰 숙부님 산소를 찾을 때까진 멀쩡한 신발만 신고 삔 발 쪽은 아예 벗었답니다.

정말 힘들더군요.

 

발바닥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었고요, 숙부님 묘소 찾는 게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겨울이었다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개 들면 겨우 치 뿌연 하늘이 보일 뿐이고 길도 없이 원시림처럼 온통 소나무 잡목 수풀이 뒤엉켜서 한 치 앞도 분간이 어려운 겁니다.

저나 큰형님은 40여 년 전의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어 동물적 감각을 동원해야 했었고(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찻길이 아닌 그곳 산길을 걸어서 등하교했었으니까) 작은 숙부님께선 매년 다니시지만, 수풀이 우거져서 해마다 그 길이 달라지더라는 말씀만 거듭하시네요.

길도 없는 곳에 길을 내려니까 비탈진 곳에서 자꾸만 미끄러집니다.

그럴 때마다 뭔가를 잡으면 그건 또 이미 죽은 가지거나 나무라서 부스러지곤 하더라고요.

다른 무엇보다도 그 걸음을 버겁게 했던 건 그도 다름이 아닌 거미줄입니다.

죽은 나뭇가지에 머리통 들이박기는 거의 일상사고요, 그런 것 피하려고 엎드리거나 고개 번쩍 들었다간 또 거미줄이 얼굴에 쫙 달라붙지를 않나 참 가지가지 하더라고요.

알만한 산길(옛 차도)에서 그곳 큰 숙부님 산소까지의 직선거리가 겨우 200미터 남짓일 텐데 오르락내리락하랴 그것도 옛 산길 그 자체가 사라지고 없는 판국이니 마침내 산소에서 두 다리 쭉 펴기까진 두 시간도 넘게 걸렸을 겁니다.

혹시 나중에 다시 찾을 걸 대비해서 휴대폰 꺼내 들고 지도를 열어서 그 자리 '스크린 캡처'해 두었지요.

마침내 벌초를 마치고는 드디어 내려와서 제 선친의 묘소를 찾아 나섰네요.

 

제 선친은 공동묘지에 모셔졌기에 찾기는 큰 숙부와 달리 매우 쉽거든요.

거기 벌초도 마치고서 이제는 처음 내려왔던 날 인사하고 갔음에도 저와 막냇동생을 뺀 나머지는 거기 우리 마을 주민과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나기에 새롭게 인사를 주고받았답니다.

모두가 말 그대로 40여 년 만에 얼굴 마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처음 알았네요.

그 마을 가장 높은 쪽 산자락에서 완전 야생의 목축을 하시다 객지로 떠나셨던 우리 큰형님 연세가 어느덧 환갑을 훨씬 넘겨버리시고 이제는 진갑에 더 가까이 와 계신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아~ 나만 나이 먹는 게 아니었구나!'

그 큰형님이 광주에 제 동생들 보고 떠나겠다며 어젠 기어이 광주까지 따라오셨답니다.

그 산길에서 내내 애초기(벌초할 때 쓰는 기계) 메고서 땀 뻘뻘 흘리고서 돌아다니면서 애쓰셨는데…

아~ 우리 형님.

그 형님이 밤늦은 시각에 집으로 전화를 넣었답니다.

'방금 막 들어왔다 아이가. 아프지 말고 엄마 잘 모시고 알았재? …'

그만큼의 세월을 부산에서 살았거든요.

 

우리 형님 태어나서 엄마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고아가 되신 우리 형님.

여자도 없이 육십 평생도 더 넘겨버린 아아~ 늙어버린 노총각 우리 형님.

형님~ 사랑합니다. 아니지 형님~ 보고 싶습니다!!!

 

여기는 이글루스인데 사진과 함께하는 '고향 땅 바닷바람·산바람을 마시고 오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