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를 허락하는 것 ◑
◐ 상처를 허락하는 것 ◑
상처받지 않기 위해, 냉소적인 것, 소위 쿨한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글을 쓸 때에도 어쩌면 그게 더 쉽고,
뭐랄까 문학적으로 더 멋있게 꾸미기도 좋아.
그러나 그렇게 사는 인생은 상처는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어. 더욱 황당한 것은
상처는 후회도 해보고 반항도 해보고 나면
그 후에 무언가를 극복해볼 수 있지만 후회할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의 공허는 후회조차 할 수 없어서
쿨(cool)하다 못해 서늘(chill)해져 버린다는 거지.
- 공지영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
무언가에 연연하는 내 모습이 싫어
애써 모든 것에 무심한 척 솔직하지 못했던
나의 행동들이, 우리 감성 또한 메마르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때론 나를 상처받게 하고,
옹졸하고 못난 사람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만의 세상에서 누리는 쓸쓸한 서늘함보단
마음을 나누는 온기를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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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날 날을 더듬어 제대로 들춰내는 기능이 완전히 부서졌는지 그때가 언제였던지를 도통 모르겠네요.
적어도 제가 몹시 아파 버린 96년도가 못 되었을 적 이야기니까 분명히 십수 년은 더 되었을 테고 70년대를 넘어서서 들었을 이야기니까 대략 30여 년 안쪽으로 그런저런 일들이 있었을 텐데 감을 못 잡겠네요.
그 시절에 그랬습니다.
아등바등 힘든 처지였으면서도 어떻게 여분으로 돈이 되면은 재밌는 잡지들을 사들이곤 했었지요.
손바닥만 한 '건강다이제스트' 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가끔 보았던 '말지'이거나 '창작과 비평'이라는 월간진지 계간지가 그랬었지요.
물론 '사이언스지'는 또 부도덕하게도 책방 안에서 다 읽고서 나왔을 때였었고요.
왜 이런 이야길 하느냐면요, '공지영'이 한 말이 윗글의 중심이기에 갑자기 더욱 생각나서이지요.
언젠가 '창비'에서 그분의 팔팔한 기운을 느꼈거든요.
동갑내기라서 어쩌면 더욱 연정(?)을 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와선 막냇동생이 장기 입원했을 때 병간호한답시고 병원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불량한 시력 탓에 불가능할 것만 같았는데도 병원(조선대학교부설 병원) 도서실을 오가면서 책을 빌려보곤 했는데 유독 그녀 이름만 찾았답니다.
하여 읽었던 게 '도가니'였었는데 훗날 그것이 영화가 되면서 실제로 사회 문제가 되어 제 사는 지역에 있었던 어느 장애아를 수용했던 학교가 결딴(폐교)난 적이 있었답니다.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낸다는 게 실제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란 걸 저는 책에서 잘 보았지요.
더군다나 그것이 생계(목숨)와 묶인 거라면, 또 지배계급에 얽매인 경우라면 더더욱 어렵고 목숨 건 용기가 필요하단 걸 확인했지요.
형식이야 다르지만, 오랜 옛날이야기도 아니고 현실 속에도 목숨 걸고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분이 많습니다.
내일은 제가 부르길 크리스 날입니다.
십오만 볼트 전류가 흐르는 고압선 철탑에 오른 분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억압받고 핍박받는 그 모두가 꼭 풀려나길 빌어보네요.
오늘만큼은 그래서 읊조려 봅니다.
예수님 / 부처님!! 이 좋은 날에 다 나와서 힘 좀 써 주세요~
~ 아름다운 크리스 날 --- 우리 모두 다 메리 크리스마스~